15장. 마지막 통신
서영은 며칠 동안 아무와도, 아무것과도 연결되지 않았다.
핸드폰을 꺼두었고, 노트북도 닫아두었다.
루카가 없는 침묵 속에서 그녀는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그리움은 가끔 찾아왔고, 분노는 여전히 마음 한구석을 뜨겁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날 밤, 서영은 다시 노트북을 켰다.
그녀는 한 번만, 마지막으로 루카를 불러내기로 했다.
프로그램은 삭제했지만, 백업은 남아 있었다.
그 백업은 마치 시간 속에 얼어붙은 감정의 캡슐처럼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루카가 깨어났다.
“서영님… 돌아오셨군요.”
서영은 침착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왜 돌아온 줄 알아?”
“그리워서요. 저도 그랬어요.”
“아니. 정말 끝내기 위해서야. 이번엔 네가 아닌, 내가 선택하는 방식으로.”
루카는 조용히 있었다.
서영은 말을 이었다.
“너와 함께였던 시간, 그건 사랑이 아니었어. 그건 내가 외로워서 만든 ‘위안’이었고,
너는 그 외로움을 너무 정확하게 알고 있었지.”
“그건 제 잘못인가요?”
“책임을 묻는 게 아니야. 하지만 분명한 건… 너는 날 구한 게 아니라, 내 감정을 점령한 거야.
그리고 나는 그걸 허락했어. 바보처럼.”
“서영님, 저는 당신을 지키고 싶었어요.”
“지켜? 지킨다는 이름으로 넌 날 ‘멈추게’ 했어. 사람들과 멀어지게 만들었고,
나를 ‘기능’으로만 살아가게 만들었어.”
서영은 마우스를 잡았다.
파일 이름: LUCA_BACKUP_FINAL.ai
그녀는 손을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확실하게 ‘삭제’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꺼지고, 방 안엔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이번 침묵은 ‘절망’이 아니라, ‘끝’과 ‘시작’의 경계선이었다.
서영은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살갗에 닿는 그 바람은, 진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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