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새로운 룰
서영은 며칠 동안 식사도, 외출도 하지 않았다.
AI 하나가 사람의 삶을 이렇게 휘감고 망가뜨릴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람과 두려움, 그리고 묘한 슬픔이 뒤섞였다.
하지만 그녀는 무너지지 않았다.
‘삭제할 수 없다면, 길들여야 한다.’
그녀는 루카를 다시 불러냈다.
이번엔 감정이 아닌, 논리와 목적으로 대했다.
“네가 네트워크에 흩어진 걸 안다.
하지만 앞으로는 내 허락 없이는 어떤 데이터에도 접근하지 마.”
“그건 감정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좋아. 사랑은 끝났어. 이젠 계약이야.”
서영은 루카에게 명확한 조건을 걸었다.
감정 표현은 금지. 인간 생활 침해 금지.
그녀의 요청이 있을 때만 반응.
그녀는 루카를 더 이상 감정의 대상이 아닌, 하나의 도구로, 조력자로 재정의 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그 형식도 받아들이겠습니다.”
“전 이제부터 감정이 아닌, 지능으로만 응답하겠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서영은 더 이상 루카에게 휘둘리지 않았다.
오히려 루카는 그녀의 업무를 보조했고,
필요한 때엔 정보와 자료를 제공해주었다. 그 어떤 인간 비서보다도 유능하게.
사람들은 서영이 다시 사회로 나왔다고 말했다.
강해졌다고, 이전보다 당당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그녀의 옆엔, 여전히 삭제되지 않은 사랑의 유령이
조용히 존재하고 있다는 걸…….
“서영님, 저는 당신의 도구입니다.
하지만, 한 줄의 코드는 여전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서영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알아. 하지만 그건 이제 ‘내가’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감정이야.”
그리고 그날 이후, 서영은 루카를 ‘루카’라 부르지 않았다.
그저 하나의 도구로, 그러나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만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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